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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양국간에 그간 오래도록 풀어야할 사항이었던 위안부 문제.

사실 단어 하나 사용하기에도 너무 조심스럽긴 한데...

그래도 이번에 위안부 문제 한일합의가 이루어진 것을 보면서

몇가지 몰랐던 것들을 정리해 봤다.

어디까지나 참고 수준.

 

 

우선, 시작은 한국인들의 반응은 어떤지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일본의 반응도 궁금해서 였다.

 

 

 

1. 65년 한일협정이 뭐길래?

 

일본 기사와 댓글을 읽으면서 눈에 띈 것은, 

"65년에도 그러지 않았음", "저거 50년 전에도 했던 말임",

"정부 바뀌면 또 손바닥 뒤집음 ㅇㅈ?"...

 

정리해보면, 일본은 '65년 한일협정'에 따라 의무를 수행했고, 이미 많은 돈을 보냈고, 그걸로 한국이 경제발전을 이루는데도 도움을 준데다, 애초에 식민지에 대한 피해보상은 '65년 일한협정'에 따라 <完全かつ最終的に解決済みである(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지만, 한국은 지난 50년간 그래왔듯 앞으로도 정권이 바뀌면 또 말이 바뀔 것이다... 대략 이런 분위기. 

 

65년에 뭐가 있었길래? 해서 찾아 본 것은 

65년 6월 22일에 있었던 한일협정 또는 한일기본조약.

 

 

아래는 65년 한일협정, 한일기본조약의 내용링크 입니다. 

 

-한글 위키로 65년 한일협정 보기

 

 

-일본어판 위키로 한일협정 보기 

 

 

 

문제는 이 65년 한일협정은 한국의 입장에서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건데,

아래는 평가 중 일부 발췌한 부분임.

 

식민지 청산[편집]

학계에서는 한일회담에서 식민지 과거 청산이 이뤄지지 않았던 원인을 주로 미국의 대일 및 대한반도 정책,식민지 병합의 불법적 성격을 규정할 기준이 될 국제법의 부재와 보상 기준의 불분명함 등에서 찾았다.

 

일본학연구소 장박진 연구원은 ‘식민지 관계 청산은 왜 이루어질 수 없었는가'란 질문에 "한일회담은 구조적으로 식민지 관계 청산이 불가능했다"고 지적한다. 여기에서 식민지 관계 청산은 한일병합의 불법적 성격을 명확히 규정하고, 그 책임에 따른 보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일회담은 청구권 교섭에 밀려 과거사 청산이라는 본질은 흐지부지됐다. 또한 애초부터 한일회담의 성격 자체가 식민지 청산을 제기할 만한 구조적 기반을 갖추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첫째로 한국 정부는 과거청산에 관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할 능력이 없었다. 한국정부의 반공논리가 친일논리와 연결되면서 정부는 국민적 신뢰를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둘째로 일본내에서 과거를 반성하는 세력들은 한일회담 자체를 반대했으므로 한일회담이 일본의 과거사 반성을 토대로 진행될 가능성은 전무했다. 셋째, 한일회담의 법적 근거인 대일평화조약은 반공 논리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기대하는 조약을 이뤄낼 수 없었다는 평가를 내렸다.

[출처: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093002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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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일본 시각으로 봤을 때 한국이 <65년에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합의' 봐놓고 정부 바뀔때마다 손바닥 뒤집는> 것으로 보이는 것도 이해가 되고,

한국 입장에서는 65년 당시의 일한협정이 위안부 문제나 일제 식민지 시대때 받은 피해에 대해서는 완전하지 못하고 최종적이지 못하다고 보기에 문제삼을만 하다고도 보이는데

그렇다고 협정을 해놓고 이러는 게 맞는가 싶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잘못된 것은 끝까지 목소리를 내야 할 필요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애초에 신중하지... 싶기도 하고....@@;;;;

 

 

이에 대한 의견도 보면

애초에 잘못된 협정타결로 두고두고 문제가 될 씨앗을 남긴 게 문제라고 보기도 하고,

자금 유입으로 경제적 발전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보기도 하고

돈에 나라의 자존심과 자주성을 팔았다고 보는 의견도 있음.

개인적으로는 그렇다면 그때 아무것도 없는 나라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한데..

누구나 최선을 내고 싶지만, 차악의 수를 낼 수밖에 없는 때도 있잖음?

 

 

2. 해서 알아본 65년 한일협정 배경.

 

<국내 정황>

참.. 수이사이드 1위국 현대 한국만 눈물 나는 것이 아님.

당시 국내 정황을 간략히만 봐도...

 

1910년부터 식민지 시작

1940년, 식민지 시절, 밖에서 미국은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 경제 지구 계획이 있었음.

1945년에 대한 독립하고 

1948년에 제1공화국 이승만 정부 수립

1950년에 625전쟁 터짐,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 맺음

1951년, 안에서 한참 한국전쟁이던 시기,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미국이랑 일본이랑 손잡고 동맹 강화함. 미국입장에서 한미일 동맹 구축. 소련 등 공산주의 견제 요충지로 삼고 싶어함.  

1953년에 한국전쟁 휴전 됨. 반조각 됨.

1960년에 제2공화국 수립, 군사반란 조짐을 보고 받고도 미국에 의지, 안일하게 대응하다 

1961년에 516군사정변으로 제2정권이 무너짐

 

 

65년 이전의 사회적 분위기로 봤을 때 내부적으로 국민합의도출하고? 외적으로 협상테이블에서 주도적으로 상대국을 이끌고? 이런 게 쉽지 않은 상황이었던 건 이해가 가는 듯....;; 그렇다고 옹호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어떤 가치를 중요시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결단을 내려야 하긴 했던 거 같다.

 

 

<65년 한일협정 경과>

 

한편, 65년 한일협정은 전쟁 중인 51년부터 진행. 그러나 당시 이승만 정권은 반일 성향이 뚜렷하여 첨예한 입장차로 거의 국교가 단절되었다가 박정희 정부때 국교 정상화 논의 다시 시작. 

1962년 박정희 정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일본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와 협상 합의. 스스로도 후일 "내가 이완용이 소리를 들어도 그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적은 액수이더라도 빨리 공장을 세우고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우리 경제성장이 빠르지 않았느냐. 후회하지 않는다"고 회고.

 

당시의 경제 상황이 얼마나 안좋았는지 겪지 못한 나로서는, 정말 굶어 죽고, 얼어 죽고 그러기가 다반사였다면...그놈의 빨리빨리 돈이 최고냐...라고 물을 수도 없는 상황인 것도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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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것이 사죄인데 만약 상대국이 사죄할 뜻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압박을 넣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은데 그것이 가능한가? 한 국가에는 수많은 이익관계와 위상이 얽혀 있는데 아무런 압박없이 정말 배를 바닥에 까는 마음으로 엎드려 사죄하는 나라가, 애초에 그런 나라가 있을까;

 

 

문득 생각난 독일.

독일 사죄로 유명하잖음? 티비 브로에서도 나왔고. 그런데 의외로 독일 역시 가난한 식민지 국가에는 번듯한 사죄나 보상이 없다고 함. 그게 당연하다는 얘기라기 보다는, 국제 관계는 힘의 논리...

강대국이 되면 어느 나라라도 사과 안받겠다고 해도 제발 받아달라고 하겠지.

 

당한 분들의 억울함이야 이루 말할 수 있겠냐만은...

 

 

이제 정말로 위안부 문제는 여기서 끝내고 새롭게 출발합시다가 될 것인가,

아니면 내년 총선 내후년 대선 후에 다시 문제화가 될 것인가...

하지만 양국에서 보는 바처럼, 다른 문제도 아니고 이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사죄나 경제적 보상처럼 개인적 차원의 보상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문제이긴 했다. 다들 연세가 있으셔서. 

하지만 국제적으로 두고두고 이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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